금융권 CEO의 신년 메시지에는 보일듯 말듯한 함의가 숨겨져 있다. 물론 그냥 무난하고 뜻이 좋은 사자성어를 가져다 덕담으로 쓰는 경우도 많아서 너무 민감해 할 필요는 없지만 때론 CEO의 경영철학이 오롯히 담겨진 경우도 많다. 언중유골인 셈이다.

특유의 보수적인 문화탓인지 금융권 CEO들은 대부분 중국 고전을 인용해 고사나 사자성어를 선호한다. 비교적 자신이 원하는 함의를 효과적으로 응축해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것 같다. 올해도 역시 다양한 사자성어가 등장했다.   

하지만 올해 눈길을 끈 것은 사자성어가 아니라 영어다. 이광구 행장의 뒤를 이어 지난 12월, 새로 우리은행장에 선임된 손태승 행장은 지난 27일 '2018년 상반기 경영정략회의'에서는 '레드 퀸(Red Queen)효과'를 강조했다. 

지금의 금융시장 상황을 설명하는데 있어 '레드퀸 효과'에 비유한 것은 적절해보인다. '레드퀸 효과'는 루이스 캐럴의 소설 '거울을 통하여'에 등장하는 인물에서 유래했는데, 일반적으로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두 배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진화론의 의미에서 보면 '레드퀸 효과'는 약간 그 뉘앙스가 다르다. '공진화'로 해석되는데, 이는 말 그대로 '적과 내가 같이 동시에 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프리카 초원의 영양과 치타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게 된 것을 설명할 때 사용한다. 예를들어 남에게 자극을 받아서 나도 발전하게 되고, 그것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진화의 요인이 되는 것이다. 

지금 은행권을 비롯한 국내 금융시장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디지털금융' 서비스를 확장해나가고 있다. 이를 '레드퀸 효과'로 설명한다면 후자에 가깝다. 즉, 서로에게 자극을 받아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혁신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대형 금융그룹을 중심으로 임원급의 '디지털금융전략담당 최고책임자'(CDO) 직제가 지난 1년새 대거 신설됐으며, 그 실질적인 기능 또한 기존 보다 훨씬 확장되고 있다. 또한 인공지능(AI)기반의 다양한 금융서비스가 경쟁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좀 넓게 떨어져서 본다면, 금융회사별로 속도의 차이는 다소 생기지만 전반적으로 본다면 국내 금융산업 전체의 서비스 레벨이 레드 퀸 효과로 인해 전반적으로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레드퀸 효과'는 적과의 경쟁에서 생존 능력치를 향상시킨다는 개념에서 봤을땐 수평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수직적이기도 하다. 

농협금융지주는 김용환 회장은 2016년 빅베스를 통해 부실채권을 과감히 정리하고 2017년 목표손익을 2000억원 가까이 초과달성하는 실적을 거뒀다면서, 2018년은 기존의 벽을 깨고 퀀텀(Quantum) 점프하는 성과를 창출하자고 독려했다. 이를 파벽비거(破壁飛去)로 표현했다. 

농협금융 계열사중 농협은행이 선도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혁신적인 서비스를 2금융권 계열사에 전파시켜서, 계열사 서비스 경쟁력을 단숨이 끌어올리는 전략이다. 이른바 '디지털 혁신의 공유'다. 예를들면, 농협은행에서 기존에 시행 중인 고객 상담예약제, 전담직원 선택제 등 고객 편의성 증대를 위한 서비스를 계열사로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퇴직연금 및 신탁 시장 확대에 맞뭐 고객자산가치제고를 위한 종합 대응전략을 강구하는 것이다. 

농협금융의 경우, 이를위해 CDO(디지털금융 최고책임자)가 금융지주사와 은행을 겸직하도록 했다. 플랫폼과의 협업 중심인 'TO 플랫폼 전략'과 농협금융의 모바일플랫폼 고도화 중심 전략인 'BE 플랫폼 전략'을 제시했다. 이를 통해 1등 디지털금융사로의 위상을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DGB금융그룹은 올해 그룹의 새해 경영 목표를 '상품 및 고객서비스의 차별적 경쟁력 강화'. '변화하는 트렌드에 맞춘 디지털금융의 선도', '미래 시장 확보'로 설정했다. 이와관련 DGB금융그룹 박인규 회장은 '상유이말'(相濡以沫)이라는 사자성어를 제시했다. 

'상유이말'은 장자(莊子)의 천운편에 나오는 말이다. 가뭄이 극심하던 때 장자가 연못의 물고기가 말라죽을 것을 염려했으나 정작 연못에 가보니, 연못 한 구석에 물고기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입에서 나온 거품으로 서로를 적시면서 모두 살아있음을 보고 크게 느끼는 바가 있어 유래한 말이다. 

즉, 서로를 믿고 배려한다면 한해 목표를 반드시 달성할 수 있을 것이란 얘기인데, 이 역시 넓게보면 경쟁에서 자극받고, 서로가 가진 혁신적인 것은 나눠 갖는 내부의 '레드 퀸 효과'로 해석해도 무방해 보인다. 

<박기록 기자>rock@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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